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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정문화재 원호,원두표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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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주문화원 댓글 0건 조회 237회 작성일 25-05-23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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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 원두표 묘역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28호

지 정 일2004. 5. 6

시     대조선시대

소 재 지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 산1-1


 

원호(1533~1592)는 선조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중영(仲英)이며 충무위부사직 원중륙의 증손이자 첨지중추부사 원송수의 아들이다.

이진자(?眞子) 김덕수(金德秀)의 문하에서 윤두수(尹斗壽, 1533~1601), 이해수(李海壽, 1536~1599)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무예도 연마하였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경원부사로 재직시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무찔러 전공을 쌓았다.

 

한때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강원도조방장 (江原道助防將)으로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와 구미포(龜尾浦)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여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금화(金化) 전투에서 왜군의 복병을 맞아 분전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묘는 장암리 아랫말에 위치한 원주원씨세장지의 맨 위에 서향(西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원형대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혼유석(높이 11, 폭 94.5, 두께 38), 상석(높이 29, 폭 148, 두께 96), 향로석(높이 37.5, 폭 

44, 두께 33), 문인석(높이 214, 폭 65, 두께 55)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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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몸집의 문인석은 머리에 복두를 쓰고 손에 홀(忽)을 꼭 쥔 채 시립(侍立)하고 있다.

상석의 앞면에는 피장자의 신원을 각자해 놓았으며, 그 앞에 사각형의 향로석(香爐石)을 설치하였다.

봉분 앞에 세워진 방부개석 양식의 묘표(총 높이 194.5)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비신(높이 128, 폭 65, 두께 18)은 백대리석을 사용하였는데, 앞면에 피장자의 신원을 쓰고 나머지 삼면에 묘표음기를 각자하였다.

그러나 찬서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팔십일년(八十一秊) 무자(戊子, 1708, 숙종 34) 시월(十月) 일립(日立)”이다.

묘역 아래에 방부개석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약 364)가 세워져 있다. 비석 받침인 방부(높이 104, 폭 162, 두께 106)의 높이를 전체적으로 좀 더 높게 하여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비문은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1650~1735)가 찬(撰)하고 7세손 개성부유수 원인손이 서(書)하였으며 호조참판인 김시묵(金時默, 1722~1772)이 전액을 올렸다.

 비신(높이 205, 폭 92.5, 두께 31)의 전후에 비문을 새겼으며 상태는 양호하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삼무자(三戊子, 1768, 영조 44) 구월(九月) 일(日)”이다.


원호 묘소 바로 아래부터 연이어 좌의정 원두표 → 대호군 원몽은 → 영릉참봉 원유증 → 원계군 원유남 → 황해도관찰사 원만석 → 원흥군 원경렴 → 영동현감 원석현 → 원춘군 원세교 → 금초 원병상의 순으로 묘가 조성되어 있다.

이 같은 세장지는 도내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조선시대 묘제사 연구의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이외에도 주변에는 첨지중추부사 원송수, 은산현감 원죽수, 부령부사(富寧府使) 원희(元熹, 1543~1592), 경상수사(慶尙水使) 원양(元亮), 봉사(奉事) 원경남(元慶男), 진사 원익흥(元益興), 돈령부도정 원명익(元命益 1675~1749), 대호군 원명설, 사과(司果) 원득신(元得臣), 참봉(參奉) 원도희(元道喜) 등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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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표(1593~1664)는 현종대(顯宗代)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이며 충장공(忠壯公) 원호(元豪, 1533~1592)의 손자이자 원계군(原溪君) 원유남(元裕男, 1561~1631)의 아들이다.

대학자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 1573~1635)의 문인(門人)으로 광해군이 난정(亂政)을 펼치자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24년(인조 2)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亂)을 진압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으며 이후 전라도관찰사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당시 정계의 핵심 인물로 서인(西人) 가운데에서도 원당(原黨)의 영수가 되어 많은 활약을 하였다.

1656년(효종 7)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서 1662년(현종 3)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묘는 장암리 아랫말에 위치한 원주원씨세장지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원형대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혼유석(높이 10, 폭 94, 두께 37), 상석(높이 34, 폭 163, 두께 99), 향로석(높이 36, 폭 36, 두께 31), 망주석(높이 187, 폭 39, 두께 39), 문인석(높이 187, 폭 64, 두께 58)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문인석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망주석에는 운문(雲紋)과 연주(連珠)를 조각하였으며 상석의 앞면에는 피장자의 신원을 각자해 놓았다.

봉분 앞에 세워진 묘표(총 높이 191)는 백대리석의 비신(높이 131, 폭 63.5, 두께 29) 앞면에 단정한 대자(大字)로 원두표의 관직과 부인의 성씨를 써 놓아 합장임을 밝히고 있다.


나머지 비신의 삼면에 묘표음기를 새겨 놓았으나 표제와 찬서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묘역 아래에 당당하게 세워진 방부개석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약 355)는 대학자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이 찬(撰)하고 외예손(外裔孫)인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최중(李最中, 1715~1784)이 서(書)하였으며 판중추부사 민진원이 전액을 올렸다.


비신(높이 191.5, 폭 91, 두께 53)은 오석(烏石)을 사용하였으며 상태는 완벽하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삼을유(三乙酉, 1765, 영조 41) 십일월(十一月) 일립(日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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